사이비나 광신적 교단이 순진한 신도들을 기만하여 막심한 재정적 정신적 피해를 입히고 파멸로 이끄는 행위들은 어제 오늘날의 일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이나 미국 그리고 그 외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이비 단체의 그릇된 인도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크게 망치는 케이스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 신도들이 하나같이 너무 순진무구하고 어리석어서 그렇게 당하는 것일까? 그런 신도들의 어리석음도 원인이지만 사이비 단체의 지도자들을 보면 하나같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도들을 교묘하고 부정직하게 조종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이용당하는 신도들 대부분이 영적세계나 수행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없으며 교주가 진정 자신들을 짧은 시간 내에 깨우침으로 인도해줄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교주는 이런 신도들의 약점을 악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몰두한다.
수행력과 교학을 두루 갖춘 불자들에게는 이런 사이비 단체들이 제대로 접근조차 못하지만 수행 경험이 전혀 없는 일반 불자라면 그들도 사이비 단체의 유혹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 사이비 단체들도 다양하다. 처음부터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세우며 신도들로부터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광란적인 사이비 단체에는 무종교의 일반인들마저도 심한 거부감을 느껴 접근을 안 하지만 보다 더 세련되고 지능적인 사이비 단체는 처음부터 사이비로 구분하고 가려내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런 단체들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는 새로운 콘셉트를 내세워 유인을 한다. 즉 그들의 가르침은 모든 종교를 포용해 다양한 종교인들이 부담 없이 함께 어울려 수행할 수 있으며, 그들의 새롭고 효과적인 수행법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세속인들에게 탁월한 효과가 있어 모두 짧은 시일 내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등 귀에 달콤한 소리들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런데다 이런 사이비 단체는 규모가 크고 많은 신도들과 수행처를 갖고 있고 그들의 팸플렛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행경험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일반의 맹신적인 사이비 단체와는 달리 이론상 제법 합리적이어서 다소 편안하고 안정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거창한 규모와 화려한 언술로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사이비 수행단체는 기존의 수행법들을 마치 낡은 폐품처럼 초라해 보이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수행방법으로 진정 좋은 체험을 하는 사례도 많다. 여기서 좋은 체험이라는 것은 수행의 최종목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로움, 또는 콤플렉스 해소 등 그 나름대로 각 개인에게 의미 있고 중요한 체험들을 말한다. 수행경험이 전혀 없거나 기존의 수행법으로 별 효과를 보지 못한 사람이 사이비 단체에서 이런 체험을 처음 하게 되면 그는 당연히 그 단체의 교주와 수행법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신뢰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초창기에 경험한 이런 체험들은 그 나름대로 각 개인의 삶을 향상시키기에 필요한 과정이었겠지만 수행의 최종목표나 높은 단계는 아니다.
오래전 아는 스님과 통화한 내용이 생각난다. 그 스님과 대화 중에 수행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스님이 말씀하시길 외도수행법이 처음에는 정법수행보다 더 효과를 보는 듯해 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리지만 그런 수행법은 어느 단계에 가서는 막혀서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정법수행 (위빠사나) 은 비록 처음에는 별로 효과를 못 보는 것 같아도 한 번 확실한 진전을 이루면 막히는 단계 없이 최종목표까지 끝까지 갈 수 있다고 하셨다. 바로 이것이 정법수행과 외도수행의 차이라고 하셨다. 나는 언제고 수행을 하며 회의감이나 좌절감이 떠오를 때엔 항상 그 말씀을 마음속에 되새기곤 했다.
그러면 사이비 단체에서 더러 좋은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어째서일까? 어떤 사이비 교주들은 비록 정법수행은 아니지만 자신들 나름대로 어느 정도 수행을 하였거나 또는 이미 검증된 다른 전통의 여러 수행법들을 자신의 수행법으로 도입해서 가르치기도 한다. 그리고 수행하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경험하는 것도 다양하다. 어쨌든 수행을 해서 조금이라도 좋은 경험을 하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점점 갈수록 방향이 엉뚱한 데로 향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안 그런 것 같았는데 서서히 사이비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서서히 자신들의 가르침이 절대적 진리이고 교주는 환생한 화신이라고 주장하며 신격화한다. 교주는 자신의 신비적 능력을 내세우며 신도들을 쇠뇌 시키고 그들의 복종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교주의 신성한 힘이나 에너지를 신도들에게 전달해 준다거나 보시를 하라고 강요하여 신도들이 많은 돈을 바치도록 한다. 다양한 수행코스를 만들어 놓고 이런 수행코스를 통해 단기간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홍보하여 신도들의 의무적인 참가를 요구한다. 이런 수행코스는 수련비가 결코 싸지 않다. 또는 세계 각국에 더 많은 분원을 설립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겠다는 거대한 목표를 내세워 신도들에게 많은 돈을 기부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수행코스 중에는 신도들의 이고 (ego, 에고 ← 틀린 발음) 와 아상을 버려야한다는 이유로 신도들에게 갖은 궂은일을 시키거나 (예: 화장실 청소) 또는 수행과정의 하나로 지도자들이 신도에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굴욕이나 면박을 주곤 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겸손해져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해가며 신도들을 쇠뇌 시켜나간다. 그런데다 그들의 수행코스는 내용과 기간이 자주 바뀐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그들이 홍보한데로 참가자들이 모두 깨달음을 얻지 못해서이다. 하지만 그런 수행과정으로는 애당초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수행법도 검증이 안 되었지만 마치 수행처가 부처나 도인을 만들어내는 공장처럼 누구나 수행과정을 마치면 모두 깨달음을 얻었다고 자격증을 부여하니 프로그램 운영 자체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 이런 수행과정에서 더러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경험한 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의 플라시보 효과 (placebo effect) 를 경험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신비스럽고 깊은 체험을 해 뭔가를 얻은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효과가 사라지며 그들이 경험했던 것은 일종의 환영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수행과정에 드는 비용 또한 적지 않으니 그들의 ‘깨달음’이란 막대한 돈을 투자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많은 시간과 돈, 노력을 투자하였지만 기대하던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될 때 결국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허탈감, 좌절감, 배신감, 분노, 우울증뿐이라고 한다.
이런 사이비 단체에서는 빠른 시일 내에 탈퇴하는 것만이 가장 현명한 해결책이다.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어도 예전에 체험한 좋은 경험이나 교주에 대한 믿음을 아직 버리지 못 해 계속 남아 있던 들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갈 뿐이다. 그렇게 믿고 신뢰하던 교주는 정작 그대의 행복이나 평화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은행 계좌를 부풀리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믿고 따르던 단체에서 뭔가 이상한 조짐이 감지되어 혼란이 올 때 가장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내면의 목소리이다. 그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감을 따라야 한다.
얼마 전 카페에서 어느 수행자의 경험담을 통해 새로운 수행법을 알게 되었다. 그 수행자는 아잔 브람 스님의 위빠사나를 접해본 사람인데 그는 새로운 인도의 명상 수행법을 통해 예전에 위빠사나 수행으로는 경험해보지 못한 새롭고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 수행법은 위빠사나 수행과 병행해도 좋을 것 같다는 그의 말은 나의 흥미를 돋구었다. 그런데다 그 사람이 다니는 선원의 스님도 그 수행법을 적극 지지하였고 나중에는 스님이 그 수행법을 배우러 인도까지 갔었다. 인도에 가서 수행하고 온 스님은 그 새로운 수행법을 신도들에게도 지도할 것이라고 했다. 그 스님은 위빠사나, 사마타, 티벳불교 수행에 모두 깊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나로선 그 수행법에 대해 더욱 신빙성을 갖게 되었다. 뭔가 색다른 경험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가 일어나며 ‘혹시 이 수행법으로 나의 위빠사나 수행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을까? 또는 더 큰 진보를 빨리 이룰 수 있을까? 그러면 나도 한번 해볼까?’ 하고 마음이 솔깃해졌다. 솔직히 나의 수행법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 수행자와 스님의 체험담 그리고 나의 막연한 호기심과 부풀어 오른 기대감 때문에 그 수행법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그 수행단체는 인도에 본원을 두고 있고 이미 세계 각국에 다양한 수행모임과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1시간 20분 정도 거리에 수행모임이 있어 일단 등록을 했다. 그들의 화려한 수행처와 수행프로그램에 대해 알아보니 솔직히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먼저 그곳에서 수행한 사람들이 그 수행법에 대해 매우 좋게 말을 하기에 애당초 관심은 갖게 되었지만 내 마음은 아직도 반반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 꼭 이 새로운 수행법을 익힐 필요는 없는데 괜한 짓 하는 건 아닌가? 그러다가도 한번 가서 구경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 그렇게 부담가질 필요 없지 않겠는가! 하고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 그 수행모임에 참석하기 하루 전 그 수행단체에 대해 더 깊이 조사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더 조사를 해보니 그 수행단체에서 오랫동안 높은 위치에 있었던 멤버들이 탈퇴한 후 고백한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면서 내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어째 약간 사이비 냄새가 나는 듯 했는데 역시 내 예감이 맞았다. 예전에 사이비 단체에서 수행해본 경험이 있는 나로선 뭔지 모르게 비슷한 점들이 느껴지곤 했었다. 그래서 곧바로 그 수행을 했던 사람에게 이 사실을 카페의 글을 통해서 알렸고 그곳 스님 또한 나의 글을 읽었으리라 본다. 그리고 그 수행자와 채팅을 하며 내가 찾아낸 정보를 알려주었고 그가 그 수행법으로 얻은 경험담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스님은 그 수행단체의 수행법과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않고 수행에 도움이 되는 부분만 골라서 신도들에게 지도할 것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교학과 수행력이 풍부한 스님이라서 그런 사이비에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고 그들의 수행법 안에서도 이득이 될만한 요소들만 따로 간추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지혜로운 스님이 수행법을 신도들에게 유익이 되게 알맞게 지도한다면 안심할 수 있다.
누구나 가능하다면 빨리 목표를 이루고 싶겠지만 수행이란 애당초 쉽게 빨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생에 이미 수행을 많이 했거나 큰 선업의 공덕이 있지 않다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오히려 정상일 것이다. 빨리 가기를 바라기 보다는 꾸준히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래야 할 것이다. 정법수행은 사이비 수행처럼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과 달콤한 소리로 사람들을 현혹하지 않으며 수행방법도 사이비 단체처럼 자주 바뀌지 않고 정법수행으로 얻은 지혜는 사이비 수행법으로 체험한 일시적인 평화와는 달리 갈애와 번뇌를 제거시켜주고 영원하고 진정한 평화를 맛보게 해준다. 사이비는 순간 환하게 타오르다 꺼지는 성냥불 같지만 정법은 오랫동안 뜨겁게 타는 숯불과도 같다. 가짜와 진짜는 확연히 다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정법수행 위빠사나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수행자로선 빨리 가고 싶은 조바심을 내지 말고 짜릿하고 신비스러운 체험 또한 바라지 말고 오로지 한순간이라도 정확히 알아차려 마음이 번뇌로 물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이들이 정법수행과 인연을 맺어 진정한 평화로움을 맛 볼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