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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이야기

우리의 본래 고향

by 흐르는 강물처럼... 2013. 11. 29.


 

  

아미타불은 나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인공인 동시에
너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고,
또는 우주의 주인공이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우리 극락세계의 주인공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인간성의 본래 면목, 우주의 근본 자리,

영원히 죽지 않는 불생불렴한 그 자리, 그 자리로 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 가운데 최상의 第一義的인 법입니다.

그러기에 참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젊은 청춘을 다 그만두고

평생 걸망지고 오락가락하며 공부하지 않습니까?

그 만큼 중요함을 알기에 그러는 것입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연따라 한 가족이 되지만,

종당에 가서는 누구나 참다운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 몸 받고 금생에 산 보람이 무엇이냐고 하면,

오직 본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청화스님

 

 

얼마전 어느 카페에서 읽었던 청화스님의 법문 일부 내용이다. 청화스님은 염불수행을 하셨고 법문하실 때도 항상 염불수행을 강조하셨기에 위빠사나 수행자로서는 스님의 가르침에서 이론상 많은 차이를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스님이 염불수행단계에 대해 설명하셨던 법문을 보면 사마타수행과 상당히 일치하는 부분들이 보인다. 아미타불 염불수행이 위빠사나 수행과 얼마나 다르고, 또 청화스님이 말씀하시는 극락세계가 과연 위빠사나 수행의 최종목표인 열반과 일치하는가 따지는 것은 나에게 무의미하다. 내가 염불수행을 해보지 않고는 교리와 이론만 갖고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수행법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경솔한 행위이며 또 정확한 판단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염불수행에 대해 읽어보니 그 나름대로 상당히 흥미로운 수행법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와는 인연이 닿지 않아선지 오래전 잠시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독경해본 것 외에는 염불수행을 본격적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청화스님의 법문에 내 마음이 끌린 이유는 바로 본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부분 때문이다. 그리고 청화스님의 법문 외에도 영적 세계를 다룬 저서를 접할 땐 '우리의 본래 고향'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우리의 본래 고향... 공감이 가며 은근히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다.

 

 

난 원래 어렸을 때부터 꿈을 자주 꾸는 편이었다. 아무런 의미없는 허무한 꿈을 꿀 때도 많았지만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나 경험할 상황들을 예시하는 예지몽들도 자주 꿨었다. 그런 꿈들은 매우 선명했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일상생활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꿈속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배경이나 장소, 그 순간 느껴지는 느낌들은  참 신비스럽고 흥미롭게 느껴졌다. 꿈속에선 왜 그런 현상들이 나타날까? 꿈에서 등장하는 세계는 지금 나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특히 며칠 후나 몇년 후에 일어난 실재상황들을 어떻게 꿈속에서 미리 볼 수 있었을까? 현재 삶 외에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세계가 꿈에서 나타나는 것일까? 그런 다른 차원의 세계는 어떠할까? 아마도 현재의 불만족스럽고 무의미한 내 삶보단 훨씬 낫겠지.... 난 항상 꿈과 영적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영적세계나 정신수행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고 더욱이 불교신자가 없는 집안에서 자란 나로서 불교에 입문한다는 것은 생각 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적으로 허전함을 느낀 나는 영적세계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항상 마음속에 있었지만 그런 영적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고 감각적 욕망의 지배하에서 상당히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아가던 나로선 그런 나의 영적 관심은 그저 또하나의 관심거리에 지나치지 않았다. 더 알고 싶어도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줄 수 있는 길을 못 찾았다. 그 당시 나는 남들이 우러러 보는 좋은 직장에 다니고 경제력과 명예를 갖춤으로서 나의 무의미하고 불만족스러운 삶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난 좋은 직장을 얻는데만 열중했지만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직장을 찾지 못하게 되며 큰 분노와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그때에는 활발한 취미생활도 했었다. 내 성격상 원래 좀 짜릿한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남들이 하는 기존의 취미생활과는 조금 색다르고 위험성이 따르는 그런 취미생활에 매우 심취되어 있었다. 그 당시 내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내가 원하는 직장에 취직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실컷 즐기는 것 뿐이었다. 그것만이 내 삶의 낙이었다. 하지만 나와 같이 취미생활을 즐기던 친구가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면서 나의 관점이 바뀌기 시작했다. 예전에 열정적으로 즐기던 그 취미활동도 마치 타오르는 장작불에 찬 물을 끼어얹은 듯 열정이 순식간에 다 식어버려 이젠 더 이상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친구 장례식에서 울부짖는 친구의 가족들을 보며 좋은 직장에 대한 나의 갈망도 흐지부지 되버렸다. 그나마도 무의미한 삶에서 유일히 삶의 낙으로 삼았던 목표들을 무심하게 빼앗아간 인생은 나를 더욱 깊은 혼동과 고독으로 몰고 갔다. 마치 허허벌판에서 매서운 추위에 떠는 시들은 겨울 나무처럼 호된 시련을 감내해야 했다.

 

 

더욱 커진 내면의 공허함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지만 그 해결책을 오직 세속의 방식에 의지해 얻으려했으니 답이 나올리가 없었다. 그런 나의 삶에서 진정으로 벗어나고 싶었지만 길도, 방법도 몰랐고 주변에 터놓고 토론할 사람도 없어 항상 혼자 앓아야 했다. 한창 혼동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던 어느날 밤 꿈을 꾸었다. 서울에서 살았던 우리 집이 꿈에 보였는데 집 주변이 좀 어두컴컴했으며 그곳에 나의 영혼(?)이 맴돌며 그리워하는 것을 봤다. 그리고 배경이 바뀌며 어느 한 곳에 이층버스가 보였는데 그 이층버스 꼭대기에 시커먼 괴한이 어떤 사람을 위협하고 있었다. 괴한이 두려워 쩔쩔매는 그 사람이 참 안타깝게 보였는데 얼마 지나니 그 사람이 긴 막대기 같은 것을 구해 그것으로 괴한과 맞서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 막대기로 계속해서 괴한을 공격해 결국 그 괴한을 이층버스위에서 떨어뜨려 버렸다. 그리고 또 배경이 바뀌며 어느 큰 저택이 눈에 들어왔는데 거기에 내가 있었고 (내 모습은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의 배우자와 아이 (처음보는 사람들인데 꿈속에선 가족으로 등장함), 그리고 나의 어머니가 함께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순간 너무나도 깊고 강렬한 평화가 느껴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와 안정감에 사로잡혀있는 나에게 순간 메세지가 전달됬다. 바로 이곳이 나의 거주지라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내가 살던 현실세계는 하나의 실습장과 같은 곳이었고 그 현실세계에서 내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들은 나에게 주어진 하나의 큰 과제였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 과제를 모두 끝마쳤으므로 나의 본래 고향으로 되돌아 온 것이라고 했다. 그런 나의 본래 고향에서는 현실세계에서 살아오며 겪는 인생의 고뇌가 일체 존재하지 않았다. 치열한 생존경쟁속에서 겪는 긴장감과 초조함, 싫은 이들과 생활하며 겪는 갈등과 마찰, 혼자이기에 겪는 외로움과 우울감, 남들보다 부족해서 느끼는 열등감,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며 겪는 슬픔, 재난과 사고, 범죄에 대한 두려움, 이루고 싶은 일을 못 이루는 실망과 낙담, 그외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티끌만치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지극한 평화로움만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나에게 부여되었던 큰 과제를 현실세계에서 다 마쳤으므로 더이상 짊어질 삶의 무거운 짐덩어리가 없고 이제 내가 할 일은 나의 본고향에서 깊은 평화로움속에 머물며 편안히, 편안히 쉬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여태껏 살아온 현실세계는 사실 현실세계가 아니라 지금 있는 이 지극한 평화로움만 존재하는 나의 본고향이 진정한 현실세계라는 것이었다. 



그때에 체험한 평화로움과 행복감은 세속에선 경험해보지 못한 그야말로 말로 형연하기 조차 힘들 정도로 깊고 강력했다. 꿈에서 깨어나 눈을 떳어도 푸근함과 안정감이 여전히 느껴졌으며 꿈이었으면서도 꿈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생시가 아니고 꿈이어서 안타깝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마치 그 꿈을 통해 세속적 기준을 훨씬 능가하는 초세속적 행복이 진정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확신한 듯 했다. 여태까지 많은 꿈을 꿧지만 이 꿈은 참 희귀한 꿈이었다. 하지만 이 꿈을 꾸었다고해서 그 당시 나의 삶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꿈을 꾸고나서 몇년 후 불교에 입문하였고 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위빠사나수행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로지 위빠사나 실수행을 통해 나의 삶이 진정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꾼 그 꿈은 아직도 나의 기억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꿈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황홀하고 신비스러운 꿈을 꾸었을지라도 살아서 생활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죽은 후 극락행 티켓이 보장되었더라도 일단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하기에!

 

 

하지만 청화스님이 말씀하신 "우리의 본래 고향" 을 나로서는 건성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모든 고통이 사라졌고 오로지 평화와 행복만 존재하는 곳, 그곳을 본래 고향이라고 부르던, 진여불성이나 서방정토 극락세계라고 부르던, 또는 생사윤회가 끊어진 열반이라고 부르던 그곳은 수행을 하는 모든 이들이 도달해야 하는 최종목적지다. 그리고 그곳이 진정 우리의 본래 고향이라면 우리로선 다시 되돌아가고파 안달이 나야 할 것이다. 지금 현재 세상이 아무리 살기 좋은 곳으로 느껴질지라도 우리의 본래 고향에 비하면 고달픈 귀양살이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본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우리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흥겹고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각 수행법마다 그 길을 제시해 놓았기에 자신이 선택한 수행법에 의지해 아미타불을 염하거나, 알아차림 수행을 하며 우리의 본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의 본래면목을 깨닫기 위해 선택한 그 길로 꾸준히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런 우리의 본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금 현재 삶에서 모든 시간과 노력를 투자하는 것은 실로 값어치 있는 가장 현명한 투자일 것이다. 그 아무리 세속의 중대하고 심각한 일들도 우리 본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막을 정도로 중요하지 않다. 세속에서 아무리 중요하다고 느끼는 일들도 본고향에서 바라보면 마치 신기루와도 같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괴로움이 사라졌고 오로지 평화와 행복만 존재하는 우리의 본고향이 그리운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런 우리의 본고향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권리이다. 우리 모두 정진하여 금생에 우리의 본래 고향에 모두 도달하기를 염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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