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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이야기

수행자와 세속의 문제

by 흐르는 강물처럼... 2013. 2. 22.

 

 

 

요즘 세상엔 하루가 멀다고 사람들을 경악케하는 강력사건들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상관없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타락된 윤리 도덕에서 빗어진 각종 범죄 때문에 많은 이들이 긴장에 떨고 있다. 특히 이곳 미국에선 심심찮게 벌어지는 총기난 사건 때문에 정부가 더욱 강화된 총기규제 법안을 제정하기 위해 나섰다. 이런 총기 난사 등의 강력범죄외에도 국가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의 다양한 문제들로 어느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어느 한 곳에선 크고 작은 전쟁이나 내란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사회의 정의를 위하여 독재와 부정부패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은 한국에서도 너무나도 많이 일어났다.

 

 

정의도 부패한 권력과 잘못된 제도 앞에서 굴복되는 불공평한 사회적 현상은 우리를 순식간에 분노, 증오, 괴로움으로 몰고간다. 어떻게 이런 불공평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왜 부유층과 지배층만을 위주로한 정책 때문에 항상 힘없는 빈곤층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고통속에서 살아가야 할까? 어째서 죄없는 선량한 사람들이 사회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흉악범들의 욕구 충족을 의해 무참히 희생되어야 하나? 언제 그런 강력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더 강력한 치안정책이 수립되려나? 왜 생김새와 문화 풍습 그리고 교육수준이 다른 타민족들과 어우러저 생활하며 갈등을 빚어야 하나? 그외에도 수시로 일어나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은 우리를 매우 피곤하게 만든다.

 

 

우리가 살아가는 속세의 크고 작은 문제거리들에 대해 수행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발벗고 나서서 사회적 불평등에 맞서 피켓을 들고 투쟁하고 싸워야 할까? 아니면 속세의 문제는 우리가 관여할 것이 아니니 외면해버리고 조용히 앉아 호흡만 들여다 봐야 할까? 우리를 힘들게 하는 외부적 문제들을 대처하는 방법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번 째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노력과 때로는 투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두번 째는 고통스러운 외부적 문제를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외부 대상에 반응하는 우리의 감각적 기관을 지속적으로 관찰해 모든 현상의 특성을 바르게 이해하면서 내면에서 해방을 얻는 것이다. 삶을 살아가며 부딫혀야 하는 갖은 문제거리들을 올바르게 해결하기엔 이 두가지 방법 다 필요하다고 하겠다. 

 

 

출세간을 지향하는 불교도로선 먼저 수행의 진정한 목표와 의미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수행의 목표란 결국 내가 행복해지는 것 아닌가?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행복을 얻은 후 남에게도 그 길을 제시해 줌으로 남들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남과 세상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일단 내가 행복해야 한다. 내가 행복하면 남도 행복하고 세상도 행복해진다. 하지만 내가 괴로우면 그 고통의 불덩이는 남에게도 전달되어 남도 괴롭고 이 세상도 괴로워진다. 내가 진정한 행복을 얻고 남에게도 그 길을 알려줘 남도 행복해질 때 세상은 한결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은 절대 이기주의가 아니고 매우 중요하고 깊은 의미가 있다. 출세간에서 추구하는 행복은 세간의 행복과는 그 목적과 얻는 과정이 다르다. 속세인들은 세간의 다양한 문제거리들을 해결하고자 갖은 방법을 동원하지만 세간의 문제를 세간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갖은 문제들로 가득찬 세간에서 행복할 수 있으려면 세간의 영역을 초월한 출세간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세간의 행복과 불행은 조건들이 성숙되어 일정한 상황을 만들 때 경험되다 그런 상황을 만든 조건들이 인연에 따라 해체되며 상황도 변하면서 행복은 불행으로 불행은 행복으로 뒤바뀐다. 이런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이 세상의 흐름이다. 사람들은 세간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세간의 방식을 도용해 무단히 애를 쓴다. 하지만 인과응보와 인연의 법칙에 관한 확실한 이해가 없이는 세간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의 근본을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뿐만 아니라 세속의 정치나 사회적 불공평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또한 문제가 된다. 비록 정의, 평등, 자유를 부르짖으며 사회운동을 벌인다 할 지라도 마음속엔 증오, 분노, 악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몸에 불이 붙은 상태에서 불로 타고 있는 남을 보고 고통을 덜어주겠다고 나서는 것과 다름이 없다. 부정부패와 독재 그리고 그외 갖은 불의로 불 타고 있는 세상에 뛰어들어 정의를 찾고자 격렬히 투쟁할 지라도 정작 자신 마음안에서 타고 있는 탐욕, 원한, 성냄, 질투, 교만, 어리석음의 불을 끄지 못하는 한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매 순간 몸과 마음을 관찰해야 하는 수행자로선 세속의 잡다한 일들에 끄달릴 수 없다. 세상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나서는 것 자체는 훌륭하지만 세간의 방식을 따르는가 출세간의 방식을 따르는가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의 특성을 완벽히 이해하고 그런 불안정한 사물에 대한 잘못된 애착심을 없애 더 완벽한 평화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출세간의 방식이며 그런 출세간의 방식을 세간의 사고방식으로 판단해선 안된다.

 

 

오래전 이곳에 있는 청년학교 (민권센터) 에 잠깐 봉사일을 해보고자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땐 남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면 내 삶이 좀 나아질 수 있을까하는 기대 때문에 찾아갔는데 그 당시 청년학교에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이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주로 영어와 미국 법에 익숙치 않은 한인 이민자들의 권익향상을 위한 활동과 한인 2세들을 위한 한국역사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는 등 한인커뮤니티를 위해 많은 봉사를 하고 있었다. 사무국장은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도 대학생 시절 때 데모하다가 감옥소도 몇번 갔다 온 걸로 알고 있다. 그렇게 정의를 위해 발 벗고 뛰는 그 사무국장이 참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주말이나 주중에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 청년학교에서 필요한 잡다한 일들을 도우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저녁 무슨 일 때문에 청년학교에 잠깐 들렀는데 그날엔 사무국장이 교포 2세 아이들에게 일제시대 때 벌어졌던 위안부 사태에 대해 강의하고 있었다. 한국 여성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은 일본인들의 잔혹함에 대해 연설하면서 사무국장은 분노로 가득 차 치를 떨고 있었다. 순간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아, 이건 아니다!' 하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일본인들의 만행도 물론 괘씸하지만 혐오감과 증오심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던 사무국장의 모습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후 난 더이상 청년학교를 찾지 않았다. 그 당시 난 불교와 인연을 맺기 전이었지만 그때 사무국장의 모습을 회상하며 진정 남을 돕는 것이란 무엇인지 그 의미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저런 방식은 피해자나 피해자를 구원하려는 사람이나 똑같이 괴로움으로 불타고 있으니 그것은 결코 괴로움을 해결하고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다.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난 후 난 위빳사나와 인연을 맺고 한창 수행할 때였다. 한국에 있는 어느 수행자가 스승에게 수행하는 마음으로 불의로 가득 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올린 질문글을 보았다. 스승은 출세간의 방식과 세간의 방식의 차이점과 출세간이 지향하는 행복의 참된 의미에 대해 자세히 설하고 그런 불의로 어지러운 사회속에서도 참다운 수행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답을 주셨다. 그 수행자의 질문글을 읽으며 나는 '쯧쯧... 이 사람은 아직도 속세에 집착이 많군. 저렇게 속세의 잡다한 일거리에 정신이 팔려서 어떻게 수행을 제대로 하려는가?' 하고 그 수행자의 고민을 하찮게 받아 넘겼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난 한국이나 미국에서 벌어지는 왠만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선 애당초 무관심한 편이라서 질문을 올린 그 수행자의 고민이 내 마음에 전혀 와 닿지가 않았었다. 그러다 얼마 후 내가 관심과 애착을 갖고 있는 한 분야에서 잘못된 국가 정책으로 인해 무고한 시람들이 피해자로 희생되는 사건들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크게 격분하는 일이 있었다. 증가하는 분노와 호기심 때문에 그에 관한 정보들을 더 파헤쳐 봤더니 비슷한 사건들이 훨씬 더 많이 발생한 것을 알게 되며 강력한 분노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마치 가해자들을 위해 마련된 듯한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법과 정책의 목적과 그로 인해 피해자들이 겪어야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도저히 용납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나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은 그런 잘못된 정책이 사회에 끼치는 피혜의 심각성을 언론에선 오히려 침묵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증오, 혐오감, 적개심으로 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통의 불바다에서 허우적거려야 했다. 그때서야 비로서 나는 예전에 스승에게 사회적 문제와 수행자의 입장에 대해 질문한 그 수행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릇된 정치와 권력으로 인해 민중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란 어떤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때 그 심정으론 상황만 허락된다면 나 또한 피켓들고 시위대에 참가해 강력히 투쟁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국가적,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갈등으로 분쟁에 휘말린 세계 각국의 민족들과 심지어 테러 행위를 일삼는 테러리스트들의 심정이 이해가 됬다. 나를 경악케 하는 사건들은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하루 걸러 터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상황이 그러니 나의 분노는 가라앉지 못하고 날마다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그런와중에도 나의 수행은 지속되었지만 내 마음속엔 항상 혐오감과 증오심이 불타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집중수행을 하니 마음속에 저장되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수많은 망상들을 만들어내 나의 수행을 무척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수행으로 밀어부치니 어느 순간부턴 사건들을 나와 분리시킬 수 있게 되면서 나 자신을 증오와 혐오심으로 부터 해방시킬 수 있었다. 비록 외부상황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런 상황에 대한 나의 강한 집착을 놔버릴 수 있을 때 비로서 내 마음엔 안정과 평화가 찾아왔다. 만약 내가 수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 쯤 화병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독재와 부패한 권력 그리고 사회적 불의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으며 내일도 있을 것이다. 욕망과 분노, 아상, 자만, 이기주의의 어리석음을 원인으로 그에 따른 결과를 낳는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하며 굴러가는 것이 이 세상의 흐름이다. 그런 흐름을 우리 적성에 맞게끔 손쉽게 바꿀 수 없다. 바뀌지 않는 것을 억지로 바꾸려할 때 괴로움이 시작된다. 이 세상은 언제고 변할 수 있는 상황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무상하고 불안정한 요소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런 세상속에서 살아가며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은 이 세상을 능가하는 출세간의 행복이다. 우리가 출세간의 길을 갈 때 온 세상을 뒤덮는 욕망과 고난의 급류에 휩쓸려가지 않게 되고 우리 앞에 벌어지는 세속 현상들의 무상하고 불만족스러우며 오로지 조건과 인연에 따라 생하고 멸하는 특성을 깨달아 갈애와 집착을 끊어 결국엔 대상도 사라지고 대상을 아는 마음 마져도 사라진 그 열반의 자리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오늘도 수행을 통해 모든 수행자들이 열반의 자리로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염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