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가르침에 의지해 행복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수행자들에게 애착 (또는 집착)이란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수행자들로선 애착을 소멸하고 극복할 수 있어야하지만 말처럼 애착이란 그렇게 쉽게 다룰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애착에 끄달려 살아가는 데 익숙한 이들이 그런 애착들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이 쉬울리가 없으리라. 애착할 수록 우리 마음엔 번뇌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그렇게 번뇌로 뒤덮인 마음상태에선 청정함과 지혜를 얻을 수 없게 된다. 계속해서 우리의 발목을 끌어당기는 애착을 마치 무 짜르듯이 단 한번에 소멸시켜 버리고자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욕심일 수 있고 그런 극단적이고 강제적인 방법은 예상치 않던 부작용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물론 오래동안 집착하고 중독되었던 요소들로 부터 벗어나려면 강한 의지와 노력으로 단 한번에 끊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마약중독자들이 마약을 끊으려면 마약 복용량을 줄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당장 이순간부터 마약복용을 중단하고 대신 회복되기까지 전문 의료기관과 다양한 치료법에 의지해야 한다고 한다. 꼭 마약이나, 알코올, 도박처럼 심한 경우는 아니더라도 각 사람마다 애착의 대상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그런 애착들을 하나, 둘씩 놓아버릴 수 있을 때 진리의 세계로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 어느 수행자가 스승에게 성욕에 대해 질문했다. 수행자에겐 금물인 성욕을 어떻게 다루어야하는지 질문한 데 대해 스승은 얼마나 빠른 시일내에 자신의 성욕을 극복하는 것은 각 개인의 업과 성향, 취향에 따라 다르므로 성욕을 한번에 끊으려고 억지부리지 말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접근하라고 했다. 성욕처럼 강한 욕망에서 벗어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니 조급한 마음을 내지 말고 수행에 의지해 성욕을 서서히 자연스럽게 감소시키는 방법을 택하라고 알려주었다. 난 이 스승의 방법이 참으로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애착을 강제로 끊으려는 것은 한마디로 무지막스럽고 어리석은 방법이다.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방법은 효과적일 수도 없지만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더라도 그에 따른 부작용이 생기거나 얼마 못가 예전의 습성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수행을 하며 마음의 균형이 서서히 바르게 잡혀가며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바뀌기 시작한다. 마음이 편해지고 삶에 관해 예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지혜가 생겨난다. 바깥으로만 떠돌던 마음을 안으로 가져오는 습관을 들이며 내면의 평화로움을 느끼게 되고 거치른 번뇌와 갈애 또한 현져히 줄어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실질적인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을 때 수행에 대한 확신이 서며 신심은 더욱 증가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래전부터 애착하던 대상들이 모두 한번에 제거되지는 않는다. 다른 수행자들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번뇌와 집착이 많이 사라지긴 했어도 오래전부터 마음속 깊이 저장되어있던 애착의 대상들은 그것들을 갈구하는 애착심의 강도가 줄어들긴 했어도 그것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는 않았다. 그런 애착의 대상과 접촉할 때 거의 반사적으로 끄달려가는 나 자신을 종종 발견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런다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내 수행이 부족하니 그럴 수도 있지 하곤 뻔뻔스럽게 받아 넘겼다. 항상 수행자의 길을 걷는다고 자부하지만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모순된 행동을 취하게 될 땐 민망스러워서 나 자신을 질책하기도 하고 참으로 황당하고 웃긴 내 행동 때문에 허탈한 쓴웃음도 많이 지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무의식적 반응이 오래 가지 않고 다시 평정한 마음상태로 금방 되돌아오는 것을 위로삼아 그나마 수행을 한 보람은 느낄 수 있었다.
수행자로선 피하고 자제해야 하는 것들인데 언젠가 극복해야 하지않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 번뇌의 힘이 더 강해서였는지 별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비록 아직도 번뇌의 지배를 받지만 나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수행의 끈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지속하는 것 뿐이었다. 가끔 수행자답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될 땐 민망감과 죄책감 때문에 수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참 파렴치하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바보가 됬다 치고 그냥 꾸준히 밀어 부쳤다. 내가 범하는 실수들 때문에 낙담하며 수행 마저 중단한다면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오히려 퇴보를 하면 했지 절대 진보는 이루지 못 할 것이니 나로선 오로지 수행정진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는 예전의 애착의 대상과 마주쳐도 반응하는 마음이 달라졌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애착대상을 억지로 피하거나 외면할 필요없이 그런 대상들에 나의 마음이 저절로 멀어져감을 느꼈다. 비록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애착대상을 갈구하고 즐길 수록 그 결과 마음이 산만해지고 불선업의 번뇌가 증장하는 것을 더 명료하게 보게 되었다. 비록 하찮은 대상이라 할지라도 애착심을 일으켜 그것에 몰입하는 순간 평정심과 고요함은 사라지고 쾌감, 분노, 실망, 들뜸, 허망한 생각등으로 마음이 혼란스러워짐을 보며 그런 대상들의 허황된 속성을 더 정확히 꿰뚤어 보게 되었다. 비록 겉모습은 밝고 화려하게 치장하였어도 그 근본은 무명에 뿌리를 둔 체 오직 감각적 쾌락만을 자극하는 세속적 여흥거리에 점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었지만 나이 먹고 철이 든다고 이런 통찰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만약 나이를 먹어서 그렇다면 세속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중엔 노인이나 중년들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애착은 나이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만큼 갈애의 힘은 강하지만 수행을 통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통찰력 없이는 집착과 갈애의 위력과 실체를 알 수 없다.
예전에 즐기던 대상들을 내 눈 앞에 갖다놓고 실컷 즐겨라! 할 지라도 이젠 그것들이 하찮고 피곤하게 느껴질 뿐 더이상 즐기고 싶은 마음이 안생긴다. 순간적 감각적 쾌락을 자극한 후 씁쓸한 여운만 남긴 체 사라져버리는 애착대상의 그 허무한 특성을 보면서 그런 대상에 집착할 수록 괴로움만 더 커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수행의 힘이었으리라! 지속적인 수행으로 애착대상들이 미치는 영향과 애착의 원인으로 그 뒤에 따라오는 결과를 내가 직접 확인할 수 있었을 때 애착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었다. 만약 애착대상들의 특성을 통찰하지 못한 상태에서 강제로 애착심을 끊으려고 했다면 효과도 적을 뿐더러 결국엔 더 큰 고통만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수행에 의지해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던 애착심들을 하나 둘 씩 내려놓고 있다. 지금과 몇달전, 몇년전의 나 자신과 비교를 해보면 나의 안목과 마음가짐이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을 느낀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의 의식이 조금씩 조금씩 깊어져 감을 알게 된다. 더 가야할 수행의 길이 멀고 내려놓아야 할 애착심들 또한 많이 남아있다. 모든 애착심들을 쉽게 내려놓고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것 또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수행의 진보를 이루는 것이나 도과를 증득하는 것도 본인이 원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업과 그 외 조건들(법)에 따라 빠르거나 늦게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다. 아무리 빨리 이루고 싶어도 조건이 맞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법의 이치이니 수행자는 수행의 결과는 법에 맞겨버리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수행에만 몰두해야 할 것이다.
내 수행의 진보가 남처럼 빠르진 않아도 사물에 대한 인식과 안목이 조금씩 깊어져가는 것을 보며 수행한 보람을 느낀다. 수행은 절대 서둘러서 하는 것이 아니라던 스님의 조언이 생각난다. 조급한 마음을 내봤자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땐 결국 낙담과 실망만 돌아올 뿐이다. 수행결과는 법에 맏긴 체 그저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오늘도 최종목표를 향하여 한발자국 한발자국 수행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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