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을 살아가는 이들이 값어치 여기는 것들은 많고도 많다. 사랑, 자산, 직장, 명예, 건강 등..... 하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손꼽으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가장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자신의 가족을 손꼽지 않을까 싶다.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 사랑스러운 배우자와 자식들..... 그런 나의 소중한 가족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해 하나라도 더 모으려는 것을 꼭 탐욕이라고 나무랄 수 없으리라. 오늘날까지 우리가 잘 성장할 수 있기에는 부모의 극진한 사랑과 희생이 따랐으며 함께 자란 형제자매로 부터 많은 것을 배운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이 살아가며 부모나 형제자매가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생각될 때가 있는가 하면 미울 때도 있고, 때로는 심하게 싸워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동시에 정과 사랑과 애착으로 뒤범벅되어 쉽게 끊고 잊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이 가족관계인 것 같다.
사랑하는 이들이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루어 나가는 것은 세속인들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아마도 결혼식은 일생 가장 중요한 행사이고 행복한 순간일 수도 있다. 특히 첫 아이를 낳아 기르는 그 재미는 어느 것에도 비유할 수 없으리라. 부부에게 자식이 생기는 것은 큰 축복이요, 행복이며 아마도 삶이 안겨다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일 것이다.
나는 자식이 없다. 남들은 결혼해서 애 낳고 기르는 재미로 산다는데 애가 없는 내가 남들이 보기엔 안스러워선지 내 앞에서 자기 자식들에 관한 얘기하는 것을 꺼려한다. 자식이 없는 내가 너무 부러워하거나 질투심이 생겨 서글프고 마음이 아플까봐 일부러 내 앞에서 자기 아이들 얘기를 않한덴다. 왜 나는 아이가 없을까? 아마도 나는 삶의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나 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깝다. 왜 꼭 자기 기준으로 남의 상황을 생각하고 판단할까? 낳은 자식이 올바르게 성장하기에는 부모의 크나 큰 사랑과 헌신이 따른다. 그런 부모의 은혜를 나 또한 독특히 봤다. 그러기에 내가 지금 여기까지 별 탈 없이 올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선 큰 사랑과 인내와 자비 그리고 희생이 따르고 아이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으므로 자신이 더 성숙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아이를 기르는 것 자체가 수행이라고 말한다. 아이를 기르면서 자신의 인격수양도 된다니 꼭 틀린 말은 아니다. 일반인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불교도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볼 땐 수행을 제대로 해보고 저런 말을 하는가 싶다. 세간의 입각에서 볼 때 한 생명의 태어남이란 축복의 상징이지만 출세간의 입각에서 볼 때 태어남이란 괴로움이 시작되는 첫 순간이다. 태어남이란 무명으로 인한 업의 형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우리 삶의 실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희로애락 우비고뇌의 연속이다. 즐거움도 행복감도 원인과 조건 아래 일어났다 사라질 뿐 영원하지 않으며 그 뒤에 찾아오는 건 허무감 뿐이다. 아무리 다양한 세속적 일거리로 더 많은 행복을 추구하더라도 깊은 내면에서 올라오는 공허감은 메꿀 수가 없다. 행복감을 지속시키고 불행감을 최소 줄이려는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오직 원인과 결과의 법칙안에서 모든 것이 생성하고 소멸할 뿐이다. 그런 법칙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삶을 살아가자면 오직 실망, 낙담, 불만족, 괴로움만 돌아올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관찰해 보면 우리 마음안에 떠오르는 대상에 따라 행복, 즐거움, 슬픔, 우울함, 근심, 분노, 짜증 등으로 반응하는 마음작용이 일어난다. 떠오르는 생각의 대상이 좋은 것이면 더 소유하고 싶은 갈망으로, 싫은 대상이 떠오르면 성냄과 불쾌감으로 반응하는 우리의 마음을 관찰하지 않으면 모든 상황에서 탐욕, 분노, 어리석음으로 무의식적으로 반응해 재생의 원인인 업을 끊임없이 생성시키고 그 결과 윤회의 바다를 끝도 없이 표류할 것이다. 수행의 목적은 생사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이것 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 수행의 그 높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감각 기관을 관찰하고 또 관찰해야 한다. 그런 수행의 길은 오직 나 혼자만이 가야하고 오직 나 혼자만이 생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사랑하는 부모님도, 배우자도, 자녀들도 날 위해 해 줄 수가 없다. 이는 모두 각자 자신의 몸과 마음만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아이가 올바르게 성장하기까지 부모들의 많은 인내, 사랑, 이해심 그리고 희생이 요구된다. 이는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겐 막대한 책임감이고 큰 과제임을 논할 수 없다. 자식을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는 부모의 그 큰 은혜는 부모은중경에도 잘 설해져있다. 부모로서 자식을 위해 한량없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희생하는 것은 고귀하고 아름답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 몸과 마음의 무아적 성품을 깨달아 괴로움의 연속인 윤회를 끊고 해탈로 나아갈 수 없다.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행복인 열반은 사랑스러운 가족이 주는 안락함을 능가하는 훨씬 더 먼 곳에 있다.
나는 나의 자식, 나의 후손 따위를 가져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는 불교를 접하기 전에도 삶의 무의미함 때문에 나 홀로 침묵속에서 끙 끙 앓면서 헤매곤 했다. 마치 새장에 갖힌 것처럼 답답함이 내 가슴을 억누르곤 했다. 애당초 그런 삶의 허무감이 애를 갖는다고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수행으로 접어들며 삶의 허무함에 대한 확신이 더 굳게 섰다. 이런 허무하고 불만족 투성의 세상에 또 하나의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사랑하고 애착하는 마음이 큰 만큼 그에 따른 고통과 불만족이 함께 한다. 어느 대상이 우리의 바램대로 따라줄 때 기쁨과 행복을 느끼며 같은 그 대상이 우리의 바램이나 기대에 어긋나게 행동할 때 기쁨과 행복은 불쾌, 실망, 분노 등 괴로움으로 변한다. 그것은 가족관계 안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상황의 조건적 요소가 어떻게 변하는가에 따라 우리는 행복과 불행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의 변화는 어느 누구도 원하는데로 다룰 수 없이 오직 원인과 결과의 법칙안에서 진행된다. 그렇게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이 세상의 실체이고 그런 실체에 집착할 수록 괴로움만 증가할 뿐이다.
수행이란 항상 외부로 향하던 마음을 안으로 들여오는 것이다. 관찰수행을 통해 내면의 평온함을 얻으며 즐거움을 찾으러 더이상 외부세계로 방황할 일이 없게 된다. 주변에 친한 친구들이나 사랑하는 자식이 없어도 평화로움과 행복함을 느낀다. 우리 마음을 관찰하며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일어나고 그런 생각들에 다르게 반응하는 인식작용들이 순간 순간 일어났다 사라지고 그런 인식작용 또한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무아적 성품을 지녔음을 차차 알게 된다. 그래서 스승들은 내 주변에 벌어지는 상황들을 나와 동일시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모든 것이 무아의 성품을 지니고 조건적 요소에 따라 생하고 멸하는 것이니 그런 것에 집착해 나와 동일시 하면 괴로움이 시작된다고. 이 이치를 깨닫는 것은 쉽지가 않다. 쉽지 않기 때문에 꾸준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세속의 즐거움을 능가한, 그리고 몸과 마음도 소멸된 최상의 행복인 열반에 도달할 수 있도록 꾸준히 꾸준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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