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을 읽다 보면 4선정의 중요성에 대해 붓다께서 거듭 강조하시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선정 자체가 수행의 최종 목표는 아니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집중력이 있어야 사띠가 지속 될 수 있기에 선정력을 계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는 사마타의 근본삼매 (초~4선정)를 계발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집중이 지속되는 근접삼매를 닦는다. 선정의 중요성은 경전에서 자주 발견되고 수행을 하는데 있어 선정은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므로 그런 선정의 중요함을 무시할 수가 없다. 하지만 붓다께서도 그렇게 강조하셨던 선정수행이 위빠사나에서는 아예 수행과정에도 없으니 그렇다면 위빠사나 수행은 오로지 반쪽짜리 수행에 불과하는 걸 까? 이에 대해 순수 위빠사나 스승들은 어떻게 대응할까?
위빠사나 수행의 대가이신 마하시 사야도의 수제자이고 현재 세계에서 크게 존경받는 스승 중 한분인 우 빤디따 사야도는 ‘바로 이번 생에서 (In This Very Life)’에서 ‘위빠사나 선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시고 있다.
위빠사나 선정??? 사마타 선정처럼 위빠사나에도 선정이 있나? 수행자들에게는 매우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사야도께서 위빠사나 선정에 대해 설하신 일부 내용을 번역하여 이곳으로 옮겨본다.
(영문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는 한 단어 한 단어 그 뜻을 고대로 번역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단어의 뜻 보단 저자가 의미하는 의도와 뜻을 제대로 전달하고자 요령껏 번역을 했기에 다소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므로 그에 대한 양해를 구한다.)
사마타 선정(Samatha Jhāna)은 마음이 하나의 대상 (예: 마음의 표상인 빛-니밋따)에 몰입되어 마음이 그 대상에서 집중되고 벗어나지 않아 매우 평화로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는 반면 위빠사나 선정(Vipassanā Jhāna)은 마음이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다닐 수 있으며 모든 대상의 특성인 무상, 고, 무아에 초점을 마춘다. 위빠사나 선정은 열반의 희열에 고정하여 집중하는 마음도 포함하지만 고요함과 평안함이 목적인 사마타 선정과는 달리 위빠사나 선정으로 얻는 가장 중요한 결과는 통찰과 지혜이다. 위빠사나 선정은 마음을 실재하는 현상(paramattha dhammas)에 집중을 한다. 사마타 선정으로 평온함을 경험하지만 지혜를 계발할 수 없는 이유는 개념적인 대상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빠사나 선정은 실재하는 현상에 집중하므로 지혜를 계발한다.
첫 번째 위빠사나 선정
초선정에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있는데 이 다섯 가지 요소는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 거친 사유 (vitakka) - 대상에 정확하게 마음을 겨냥함.
2. 미세한 사유 (vicāra) - 대상에 부딪힘, 대상에 비벼댐. 주로 “탐구함” 또는 “숙고함” 으로 번역되지만 이는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고 함. 거친 사유로 마음을 대상에 가져와 고정시키면 미세한 사유가 마음을 대상에 계속해서 밀어붙여 벗어나지 않도록 밀착시킨다.
3. 희열 (pīti)
4. 행복감 (sukha)
5. 하나의 대상에 마음이 집중된 상태 (samādhi)
위의 다섯 가지 요소를 갖추었다고 해서 위빠사나 선정에 들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법(法)을 관통해 마음과 몸의 상호적 관계를 볼 수 있어야 첫 단계의 위빠사나 선정에 근접할 수 있다. 수행자가 위빠사나 세 번째 통찰지혜인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사유에 의한 앎 (sammasana-ṇāṇa)에 도달하면 위빠사나의 초선정을 성취한 것이다. 위빠사나 초선정을 닦는 데에는 거친 사유 (vitakka 정확한 겨냥) 와 미세한 사유 (vicāra 포착)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마치 얼룩진 금속컵을 닦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더럽혀진 금속컵을 헝겊에 올려놓고 한 손으로는 컵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헝겊을 금속컵에 비벼대는 것과 같다. 계속해서 컵을 닦아나가면 나중엔 금속컵이 깨끗해지고 광택이 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마음을 일차대상(예: 복부)에 가져와야 한다. 수행자는 그 대상을 계속해서 마음챙김(주시, 관찰)으로 번뇌의 때가 사라질 때까지 닦아나가야 한다. 그러면 수행자는 그 대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성품을 통찰할 수 있게 된다. 금속컵을 들고 있는 것은 vitakka 와 유사하고 금속컵을 닦는 것은 vicāra 와 유사하다. 만약 수행자가 한 손으로 컵을 들고 있지만 다른 손으로는 그 컵을 닦지 않는다면 그 컵의 때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또는 수행자가 컵을 똑바로 붙잡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컵을 닦으려 한다면 컵이 제대로 닦일 수가 없다. 이런 예를 통해 이 두 가지 요소(vitakka & vicāra)의 상호의존관계를 볼 수 있다.
두 번째 위빠사나 선정
수행자의 의식이 또렷해지고 날카로워지면 매 순간마다 매우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보게 된다. 마음챙김이 날카로워지고 지속됨으로 산만한 마음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몸과 마음의 무상한 특성에 대한 의심도 없어진다. 이때는 수행이 한결 쉬워진다. 노력을 요하는 몰두함과 사유함이 사라지고 환희와 희열이 일어난다. 이런 생각이 없는 순수한 주의(nonthinking bare attention)를 위빠사나 2선정이라고 한다.
위빠사나 초선정에서는 마음이 노력함과 산만한 생각으로 혼잡하였지만 일어나고 사라짐의 통찰지혜의 초기단계에 도달하면 위빠사나 이선정에 도달하여 명료함, 희열, 법에 대한 확신, 행복감이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이때에는 희열과 정신적 신체적 행복감이 강해져 이런 특별한 행복감에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어떤 수행자들은 이때 자신이 도과를 성취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현상에 집착하면 내면에 머물러버리기(stopping within)에 그들의 수행은 더 진보하기 어려워진다.
세 번째 위빠사나 선정
희열이 서서히 사라지고 마음챙김과 집중력은 더 깊어진다. 사물의 본 성품에 대한 통찰력은 매우 강해진다. 이때에는 깨달음의 요인인 평온과 평정이 지배한다. 즐겁거나 불쾌한 대상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몸과 마음에 깊은 편안함이 일어난다. 수행자는 오랜 시간동안 통증 없이 앉아있을 수 있고 몸이 가볍고 순수하고 원기 왕성해진다. 세 번째 위빠사나 선정에서는 편안함(행복감)과 일심집중(one-pointedness of mind)의 두 가지 선정의 요소가 있다. 세 번째 위빠사나 선정은 일어남과 사라짐의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을 때 일어난다.
네 번째 위빠사나 선정
세 번째 위빠사나 선정은 희열의 절정이라고 한다. 왜냐면 그 다음에 오는 네 번째 선정에는 더 이상 희열이 없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서서히 일어남과 사라짐의 단계에서 소멸의 단계로 다가가면 현상의 처음과 중간은 더 이상 분명하지 않고 현상의 소멸만 지속적으로 관찰된다. 몸도 없는 것 같고 오직 순수한 현상만이 지속적으로 분리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수행자는 더 이상 편안함을 못 느끼고 매우 빠르게 사라지는 현상 때문에 당황하게 되고 심란해지며 불편함을 겪게 된다. 이때에는 대상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버린다. 텅 빈 공간만 남겨놓은 체. 그 다음에 나타나는 현상도 똑같은 특성을 나타낸다. 개념이 또렷하지 않고 흐릿해진다. 지금까지는 현상을 분명하게 보았지만 이제부터는 지각과 인식이 뒤섞여 현상의 궁극적 실체와 개념적인 실체를 함께 보게 된다. 소멸지의 통찰지혜에 도달하면 개념이 사라진다. 이 단계에서 수행자는 자신의 수행이 퇴보하는 줄 알게 된다. 불만족이 일어나고 더 이상 편안함은 없다.
수행자는 차분하게 지속적으로 흘러가는 현상을 바라보며 서서히 안정성을 되찾게 된다. 소멸지의 단계에서는 더 이상 신체적, 정신적 즐거움이나 편안함이 없고 신체적인 불편함이나 통증도 없다. 마음의 느낌은 싫지도 좋지도 않고 중립적이다.
네 번째 위빠사나 선정에서 경험되는 두 가지 선정 요소는 평정심과 일심집중(새김)이다. 이 때에는 마음이 즐겁지도 불쾌하지도 않고, 편안함이나 불편함이 없는 평정심이 일어난다. 평정심은 마음의 균형을 바로 잡아주는 대단한 힘이 있다. 마음의 균형이 잡히면 알아차림은 완벽하게 순수하고 예리해진다. 현상의 미세한 면들을 입자와 진동으로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
첫 번째 위빠사나 선정에서는 균형이 계발되지 않고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할 때는 산만한 생각들이 많이 뜬다. 두 번째 위빠사나 선정에서는 짜릿한 희열감이 우세해 평정심을 지배한다. 세 번째 위빠사나 선정에 도달하면 달콤한 행복감과 편안함이 있어 마음의 균형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다 네 번째 선정에서 편안함이 사라지며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고 마음의 균형이 잡히기 시작한다. 소멸지 후에 공포지, 혐오지, 해탈 지향지가 일어난다. 평정심은 평정지가 일어날 때까지는 아직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 단계는 수행과정에서 매우 깊은 단계로서 알아차림이 매우 민첩해져 대상을 마음이 좋고 싫음의 구별로 동요되기 전에 미리 알아차린다. 집착이나 혐오감등이 일어날 기회 조차 없어진다. 불쾌하거나 흥미로운 대상들이 더 이상 마음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미세한 알아차림은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일어남과 사라짐은 진동으로 변하고 입자들로 분열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앉아 있을 때 몸에 대한 지각도 사라진다. 병이나 통증도 사라지고 육체적인 현상이 더 이상 지각되지 않고 육체가 없다고 아는 오로지 의식만 남아있다. 이 때에는 이 의식이 알아차림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 의식도 알아차리면 깜박거리다 다시 나타나며 동시에 마음은 매우 선명하고 날카로워진다.
이 네 가지 위빠사나 선정은 각 단계마다 독특한 즐거움의 특징을 나타낸다. 첫 번째 선정에서는 떠나버림 즉, 마음이 수행의 장애로부터 벗어난 즐거움이 있다. 두 번째 선정에서는 즐거움과 집중력을 경험한다. 강한 집중력은 희열과 편안함의 즐거움을 가져오고, 세 번째 선정에서 희열이 사라지면 평정의 즐거움이 일어난다. 그리고 네 번째 선정에서는 평정심으로 인한 순수한 알아차림을 경험하게 된다.
네 번째 선정의 즐거움이 최고의 즐거움이다. 하지만 이 또한 나머지 앞의 세 가지의 선정처럼 조건 지어진 영역 안에서 일어난다. 수행자가 이 단계를 넘어서야 비로소 궁극적인, 진정한 평화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이 궁극적 평화는 모든 명상의 대상,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형상, 알아차리는 마음이 모두 완전한 정지에 이를 때 일어난다.
수행자 여러 분들이 위빠사나 선정으로 경험하는 네 가지의 즐거움을 맛 볼 수 있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 가장 높은 즐거움인 열반의 즐거움 또한 맛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마타 선정 | 위빠사나 선정 | |
초선정 | 감각적 욕망, 해로운 법을 떨쳐버림, 거친 사유, 미세한 사유, 희열, 행복감, 삼매 | ① 명색구별지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② 인과지 (paccaya pariggha ñāna) ③ 무상지, 사유에 의한 앎 (sammāsana ñāna) |
이선정 | 사유와 숙고가 멈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 희열과 행복이 있음. | ④ 생멸지 (전) (udayabbaya ñāna) |
삼선정 | 희열이 사라짐, 새김을 확립, 올바로 알아차림, 평정, 신체적 행복 | ④ 생멸지 (후) (udayabbaya ñāna) |
사선정 | 즐거움과 괴로움을 버림, 만족과 불만족 사라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 평정과 새김, 청정함 | ⑤ 소멸지 (bhaṅga ñāna) ⑥ 공포지 (bhaya ñāna) ⑦ 비참지 (ādīnava ñāna) ⑧ 혐오지 (nibbidā ñāna) ⑨ 해탈지향지 (muñcitukamyatā ñāna) ⑩ 재관찰지 (paṭisaṅkhā ñāna) ⑪ 평정지 (saṅkhārupekkhā ñāna) |
우 빤디따 사야도의 위빠사나 선정 모델
위의 내용은 우 빤디따 사야도가 위빠사나 선정에 대해 단계별로 설하신 내용이다. 사야도는 수행력이 매우 깊고 명성 높은 스승으로 세계의 수많은 수행자들을 지도해 오셨다. 사야도가 설하신 위빠사나 선정은 이미 그의 스승인 마하시 사야도께서도 설하신 바가 있다. 사마타 선정과 위빠사나 선정이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사마타 선정에서 경험되는 요소들이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도 경험되기에 '위빠사나 선정'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사야도가 배열해 놓은 위빠사나 선정 단계는 한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주관적인 견해일 수도 있다. 왜냐면 다른 위빠사나 스승들이 배열해 놓은 위빠사나 선정 단계는 사야도의 모델과는 또 다르다. 위빠사나 선정이 사마타 선정과 얼마만큼 일치하는가 따지고 논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솔직히 '위빠사나 선정' 이라는 억지로 끼워 맟추기 식의 새로운 사상을 제창하여 자신들의 수행전통을 변호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어 보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은 수행을 통해 궁극적 진리를 깨달아 괴로움을 여의고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고 위빠사나 수행은 그것을 가능케 해 준다는 것이다. 위빠사나에서 말하는 선정에 대해 알아보고 정리해보는 의미에서 우 빤디따 사야도의 법문 일부를 올린다.
'스승의 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선(行禪)의 효험 - 우 실라난다 사야도 (0) | 2013.09.09 |
---|---|
사띠하는 두 가지 방법 - 우 떼자니야 사야도 (0) | 2013.07.01 |
바른 마음가짐 - 우 떼자니야 사야도 (0) | 2012.10.26 |
이하백도(二河白道) - 대은 스님 (0) | 2012.08.14 |
In the Dead of Night - Ajahn Chah (0) | 2012.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