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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이야기

출가에 대한 나의 견해

by 흐르는 강물처럼... 2015. 5. 23.



출가란 붓다의 가르침을 몸소 익히고 평생을 붓다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상가에 입문함을 말한다. 출가자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실로 모든 불교도들로부터 존경을 받을만하지만 동시에 많은 어려움을 수반하므로 아무나 쉽게 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출가를 하기에는 강한 결심이 필요할 것이고 또 많은 생각과 고민이 오고 갈 것이다. 출가를 하기 전 먼저 출가자의 삶에 대한 바른 이해와 상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출가자의 삶이 진정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는 이상적인 삶인지 제대로 파악한 후 결정을 내리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나는 한국대승불교를 통해 처음으로 불교를 알게 되었고 불교는 내가 오랜 세월 애타게 갈구하던 답을 제시해주어 나로선 큰 위안과 해방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원래 불가하고 인연이 있었는지 불교이론부터 스님들과 절간 분위기 등 불교의 모든 것이 너무도 좋고 편안했다. 무의미한 나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불교는 제시해주었고 그 길을 따라 수행해나가 결국 해탈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다(지금도 여전하지만). 하지만 그 당시 내가 접한 불교는 열반은 오로지 출가자들에게만 제한되었다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내 나름대로 불교의 수행법을 배우고 싶어 여러 스님들과 선원을 찾아다녔지만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 미국에서 포교사를 모집한다는 어느 한국스님의 광고를 보게 되었다. 포교사 과정은 3년 정도 수행과 이론을 익힌 후 정식 포교사로 활동하게 되는 건데 사실 출가나 다름없었다. 그 당시 유일히 미국 내에서 배울 수 있는 불교전문교육과정이라서 나로선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포교사가 되기 위해선 집도 직장도 모두 버리고 떠나야하지만 어차피 속세에는 미련과 집착이 없었고 내가 좋아하는 불교 속에 파묻혀 원하는 불교공부 실컷 하며 여생을 보낸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윽한 절간 분위기 속에 흠뻑 젖어 기도, 염불, , 참선 다 해가며 불교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마냥 좋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행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너무도 부족했고 불교라면 그저 마냥 좋았던 터라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선 오로지 출가만이 해결책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망설여지는 것이 있었다. 만약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하는 처지라면 기왕이면 수행력이 높은 스승 아래로 들어가 수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한국스님에 대해선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웬만한 유명한 큰스님들처럼 탄탄한 족보나 수행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 스님은 과연 해탈을 경험했는지, 그리고 이 스님 밑에서 해탈을 경험한 제자들은 얼마나 되는지 의문스러운 점들이 있었다. 그래서 좀 더 고려해보기로 하는 중 우연히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의 지혜(소걀 린포체)를 읽게 되었는데 그 책을 통해 접해본 티베트 불교의 깊고 신비스러운 수행체계는 한마디로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한국불교와 같은 대승불교권이면서 밀교의 신비스러운 요소까지 더한 티베트불교의 수행법은 상세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더욱 흥미를 돋웠고 왜 많은 미국인들이 티베트불교에 심취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왜 이런 수행체계가 한국불교에는 없는지 그리고 이런 수행체계의 중요성을 절실히 실감하며 수행에 대한 나의 열정은 더욱 높아져갔다. 그러다 결국 처음으로 10일 위빠사나 수련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해가며 서서히 불교와 수행에 대한 바른 인식과 이해를 갖기 시작했다. 위빠사나를 수행법으로 선택한 후 티베트의 밀교수행법에서는 마음이 멀어졌고 예전에 가졌던 한국불교에 대한 나의 애착은 불교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이 그저 불교의 숭고한 분위기와 신격화된 깨달음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집착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포교사를 모집한다는 그 한국스님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 스님은 미국에 새로운 불교 종단을 창립했고 자신을 종으로 취임시켰으며 결혼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스님이 왜 예전에 나와 전화로 통화할 때 자기 제자들에게는 결혼을 승낙한다는 지 그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스님의 수제자들이 쓴 저서를 읽으며 그들의 수준을 알 수 있었고 더 나아가 그 스님의 수행지도방식에 대해서도 가늠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스님한테 안 간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위빠사나 수행처나 남방불교선원의 법당에 가 앉아있으면 기존의 한국불교의 고즈넉하면서도 묘하고 신령스러운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넓은 응접실에 불상 하나만 달랑 모셔놓았고 불상도 매우 이국적이어서 다소 생소하고 낯선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국불교의 친숙한 불교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는 진정 살아있는 법이 있다. 붓다의 가르침을 접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친숙하고 고즈넉한 불교의 상()마저도 버려야 했다. 진정한 붓다의 가르침은 그런 상을 너머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수행을 해나가며 출가에 대해 좀 더 바른 이해와 상식을 갖게 되었다. 예전에는 출가만이 수행의 최종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꼭 출가자가 아니더라도 재가자의 신분으로 최종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럴 수 있기에는 도과를 성취한 재가수행자들과 스승들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꼭 출가자가 아니더라도 재가자의 신분으로도 바른 수행법으로 수행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은 보여주었다. 출가는 어떤 면에서는 군대에 입대하는 것과도 같다. 출가자는 상가라는 한 단체에 소속되어 일정한 규정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부담(?)이 있다. 출가자들로서 지켜야 할 계율은 엄격하고 종류도 많다. 그리고 출가자라고 수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다양한 종교적 의례 활동에도 참여해야 하는 의무가 따른다. 출가자의 삶은 규칙적인 단체생활을 의미하며 그런 상가라는 또 하나의 단체의 틀에 얽매이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적어도 먹는 것이나 입는 것 등 사소한 사생활에 어떤 것은 허락되며 어떤 것은 금지되는지 일일이 계율의 구애를 받아가며 살고 싶지는 않다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나는 내 삶을 남들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생활의 기본적 요소인 의식주는 내 능력으로 마련하고 싶지 그런 것 마저 남들의 지원에 의지해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상가가 수백 년 동안 유지된 것은 붓다의 가르침이 위대해서이지만 동시에 재가자들의 물질적인 보시가 있어서이다. 재가자들의 보시 없이는 상가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재가자의 삶을 산다고 출가자보다 번뇌에 더 노출되는 것도 아니다. 비록 번뇌로 가득 찬 속세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수행으로 마음을 청정히 닦는다면 번뇌에 물들지 않고 평화로움과 고요함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반면 아무리 물리적으로 속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마음속의 번뇌가 수그러들지 않는다면 끊임없는 내면의 갈등과 충돌로 결코 평화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수행만 하기 위해서는 꼭 출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출가자에게는 장기간 동안 수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지만 속세에서 살면서 틈틈이 짬을 내 수행하는 것도 오랜 세월 동안 지속할 수 있다면 그 위력을 무시할 수 없다. 진정 출가를 원한다면 수행뿐만 아니라 출가자의 라이프스타일 그 자체를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이 2,600 여 년 동안 보존될 수 있었음에는 상가의 큰 노력이 뒤따랐다. 상가는 오늘날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오랜 세월을 거쳐 수행과 이론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집대성하였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조금이라도 혜택을 본 사람들은 그런 상가의 노고에 깊은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상가에 입문해 자신의 인생을 붓다의 제자로 살아가는 데에 바친다는 것은 참으로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비록 출가자의 삶을 택하지는 않았어도 나는 그런 진정한 출가자들을 항상 존경할 것이다. 예전에 잘 알고 지내던 어느 비구니스님은 출가를 해 승려로 살아가려면 소위 중팔자를 타고나야 한다고 했다. 그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만큼 출가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다는 얘기다. 아마도 나는 이번 생에는 출가자의 팔자를 타고난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출가자의 삶보다는 수행자의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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